아홉개의 조선 왕릉, 동구릉을 가다~~

2011. 2. 21. 18:23judy 우리나라 구경하기/경기도 인천 그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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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개의 왕릉이 있는 동구릉..

일단 숫자에 놀라고 그 넓은 곳을 어찌 다닐까 싶어

망설이고 있다가 찾아간 동구릉.

 

 

조선을 세운 태조의 능으로 쓰이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 능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인데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능이란 의미로,

능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ㆍ동칠릉이라 불렀는데

1855년(철종 6)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한다.

 

 

 

입장료 천원을 내고 들어서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홍살문~

홍살문은 왕릉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건축적인 장치로

이곳을 지날때 몸과 마음가짐을 엄숙히하고

 이곳에 모셔진 분들에게 경건한 예를 갖추라는 뜻으로 세워진 것이라 한다.

 

 

 

 

 

 

처음 만나게 되는 수릉~

수릉은 문조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합장릉이다

 추존 황제 효명세자 문조(文祖)는 23대 왕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 사이의 큰 아들이자

24대 왕 헌종의 아버지로 1812년(순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어린 효명세자는 정조가 승하한 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하였을 시기에

1827년(순조 27)에는 19세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시작,

대리청정을 통해 강인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22살의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효명세자가 일찍 승하함으로 인해 왕비로서의 영화도 누려보지 못하고,

 안동김씨의 세도에 눌려 지내던 신정익황후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대원군과 함께 손잡고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후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의 권력을 거머쥐었다.

꽃문양 담으로 유명한 경복궁의 자경전은 재건된 것이기는 하나,

흥선대원군이 그녀를 위해 1867년 지은 건물이다.

 

 

 

 

 

 

 

 

 

 

 

 

 

 

수릉을 보고 난 후 건원릉으로 향하는 길~

호젓한 숲길이 예뻐서 찍던 중..

 

 

 

푸드득 날아가는 매 한마리~~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봉분에는 다른 왕릉들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덮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태조의 건원릉에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덮여있는 까닭은 태조의 특별한 유언 때문이라 한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는 위업을 이뤘지만,

그 후 왕자들이 형제간의 살육을 마다하지 않으며 벌이는 권력 다툼을 겪는 등

무거운 마음의 짐을 안은 채 말년을 보내야 했다.

승하하기 전 태조는 왕 이전의 한 사람으로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 땅의 흙과 풀 아래 잠들고 싶은 마음을 유언으로 남긴 것이라 한다.

 

 

 

태조 이성계의 능을 가깝게 보고 싶은 맘이었으나

이리 먼곳에서 보는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 맘을 알았는지 관리하시는 분이 저쪽 목릉은 능까지 올라갈 수 있으니

가보라 말씀해주시기까지..

 

 

 

건원릉을 지나 동구릉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목릉에는

능까지 올라가 볼수 있다는 관리인의 말처럼 능을 가까이에서 볼 수있게 되어있었다. 

14대 선조와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세 사람이 잠들어 있다.

같은 능역 안의 각각 다른 언덕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동원이강릉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제일 왼쪽에 보이는 것이 선조의 능이고, 가운데가 의인왕후,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선조의 능에는 3면의 곡장이 둘러져 있고,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여기에 난간석과 혼유석, 망주석 1쌍과 석양, 석호 2쌍이 배치되어 전형적인 상설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의인왕후릉은 병풍석이 생략된 채 난간석만 둘러져 있다.

임진왜란을 치른 후 능을 조성했기 때문에 석물들의 크기만 클 뿐 사실적이지도 입체적이지도 못하다.

 

 

 

인목왕후의 능이다.

인목왕후릉 역시 의인왕후릉과 같은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원릉은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난간석을 둘러 만든 쌍릉이다.

 

 

 

영조는 숙종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이다.

영조는 강하고 결단력 있는 군주였으나, 내면으로는 자신의 출생 신분과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과 정쟁에 휘말려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연 등 평생 큰 아픔을 삭여야 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66세 영조의 비가 된 정순왕후는 그 후 사도세자를 살해하는데 빌미를 제공하고,

 정조와 반대 입장에 섰으며, 순조 대에는 수렴청정을 하며 실질적인 국왕의 권한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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