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염으로 유명해진 개암사와 후백제의 시조가 잠들어있는 견훤왕릉을 둘러보다~

2017. 11. 24. 05:00judy 우리나라 구경하기/충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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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를 들러본 후 익산을 가기 위해 도로를 달리던 중

유난히 눈에 들어오던 산 위의 바위가 있었다.

신기하게 생겼다며 얘기를 나누며 길을 가던 중 개암사라는 갈색표지판이 보인다.


개암사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듯해

잠시 짬을 내어 그곳으로 가줄것을 부탁해본다.

나중에 포스팅을 위해 개암사를 검색해보니

1,300여년전 사찰의 스님들 사이에 민간요법으로 만들어 사용하던 죽염을

1998년 개암사 방장스님으로부터 그 비법을 전수받아

상업적으로 처음 만들게 된 곳이 이곳 개암사 부근이라고 한다.

또한 개암사로 가는 길은 벚꽃으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아마도 봄이 되면 개암제라는 작은 저수지를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장관을 이룰것 같다.



도착한 개암사는  일주문을 통과 후 개암사 전경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때마침 개암사의 주요전각들이 개.보수중이라 공사현장의 어수선한 풍경이 보일뿐이었다.

그러나 길을 지나며 봤던 멋진 바위가 바로 개암사 뒷편에 있는 울금바위라고 하니

뜻밖의 풍경을 만나게 된 셈이다.




아쉬운 마음에 돌아갈까 싶다가 산 위의 울금바위와 함께 어우러진 풍경이라도 보고싶어

컨테이너와 철가림막이 설치된 경내로 들어가보았다.




대웅보전은 보물 제292호로 지정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대표적인 조선 중기 건물이다.

이 절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울금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고, 이 바위에는 모두 3개의 동굴이 있다고한다.

그 가운데 원효방이라는 굴 밑에는 조그만 웅덩이가 있어 물이 괴는데

 전설에 의하면 원래 물이 없었으나 원효가 이곳에 수도하기 위해 오면서부터 샘이 솟아난다고한다.




개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며,

634년(무왕 35)묘련(妙蓮)이 창건한 백제의 고찰이다.

개암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82년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우(禹)와 진(陳)의 두 장군으로 하여금 좌우 계곡에 왕궁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妙巖), 서쪽을 개암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개암사 누각과 공양간공사가 진행되어 개암사의 전경을 담기가 곤란한 탓에

그저 애꿎은 대웅보전과 뒷편 울금바위만 찍게 된다.




사진으로 담진 않았지만 절에는 삽살개처럼 생긴 멍뭉이가 있었는데

세상사에 시들한지 사람이 곁으로 가도 전혀 반응도 보이지 않고

털의 상태가 그닥 좋아보이지않아 마음이 영 씁쓸했다.







개암사 경내 한쪽에는 녹차밭이 꽤 큰 규모로 자리잡고 있었다.

봄이 되면 연초록의 녹차밭의 모습도 예쁜 곳이 될것 같았다.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일행을 위해 서둘러 개암사를 나가면서도

산위의 울금바위에 계속 시선이 머문다.




결국 공사장 가림막 아래 빈틈에 카메라를 넣어 마지막 풍경을 찍어보았다.




개암사의 보수공사가 끝나고 나면

산 위의 울금바위와 아름다운 사찰의 모습으로 다시 볼수 있을듯 하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 길 가의 이정표에서

견훤왕릉이라는 글자를 보고서는 불쑥 가보기를 청한다.

마다할 이유가 1도 없어 오케이를 외쳐본다.






견훤(甄萱, 867년 ~ 936년 9월 27일(음력 9월 9일)

재위:892년?/900년? ~ 935년 음력 3월)은 신라 말기의 장군이자 후백제의 시조이다.

892년부터 935년 음력 3월까지 후백제(後百濟)의 국왕으로 재위한 그는 본래 통일신라(新羅)의 장군이었으나

88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백제(百濟) 부흥 운동을 전개하여 892년에 무진주를 점령하였고

900년에 비로소 후백제의 군주가 되었으며

935년 음력 3월에 첫째아들이자 적장자(嫡長子)인 신검(神劍)이 일으킨 정변으로 보위에서 축출되었고

 대리 집정을 하던 신검은 같은 해 935년 음력 10월 17일에 비로소 후백제의 제2대 군주로 등극하였으나

이듬해 936년 음력 9월 8일에 태조 왕건(太祖 王建)이 일으킨 거병으로 후백제는 끝내 멸망하였고

등창을 앓던 그는 그 다음날인 936년 음력 9월 9일에 훙서하였다

                          ----인터넷 발췌




후백제의 시조인 견훤의 능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적막함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주차장에는 단 한대의 차량도 없었고 찾는이도 그닥 많지 않아보였다.
















견훤의 능이 있는 곳은 주변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내가 죽으면 모악산을 바라보게 하라는 기록과

또한 죽을 때 완산이 그립다고 유언함에 따라 완산(지금의 전주)을 향하여 묻어 주었다고 한다.










올라오는 계단으로 봐서는 제대로 관리가 되고 있을까 싶었지만

막상 올라와보니 정갈하게 유지 관리가 되고 있는 모습이었고,

견훤왕릉은 1981년 12월 21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었다한다.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의 손으로 넘겨주어야만 했던

견훤의 슬픈 영혼이 쉬고 있는 곳

그래서 더욱 더 적막하고 쓸쓸함이 묻어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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