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효심이 어린 용주사, 그리고 융,건릉을 가다.

2012. 9. 26. 06:00judy 우리나라 구경하기/경기도 인천 그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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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전 부모님 산소 벌초를 하기 위해 떠났던 키다리 아저씨가

강력한 태풍의 영향으로 세차게 내리는 비때문에 고향 직전에서

서울로 바로 돌아오는 중이라며 연락이 왔다.

어차피 나선 길 어디 나들이 갈곳이 없냐는 소리에

일단 서해안쪽으로 가기로 하며 나선길.

 

 

새벽5시까지 잠을 못 이루다가 두어시간 쯤 잠을 잤을까..

비몽사몽간 카메라와 따뜻한 커피만 챙겨서 따라간 길.

탄도항에 도착하니 이미 바닷물은 한껏 빠져있는 상태였다.

 

이곳은 내게 가슴아린 추억이 있는 곳이었다.

작년 여름 울 공주를 데리고 저 풍력발전기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바닷바람도 쐬게 해줬던 곳.

그래서인지 이곳에 올때마다 가슴이 싸하게 아리다.

ㅠㅠ 보고싶다..

 

 

 

멀리서 보면 누에를 닮았다 하여 누에섬이란 이름이 붙여진 이곳은

휴일을 맞아서인지 많은 가족들이 섬으로 들어가는

바닷길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이곳은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갯벌체험도 가능한 곳이기도 해서

때마침 관광을 온 중국인들이 갯벌에 들어가 조개를 캐는 체험을 하고 있었다.

 

 

 

 

 

바닷길을 걸어 도착한 누에섬등대전망대.

물때에 따라 관람시간은 변동이 된다고 한다.

이날은 09시부터 14시까지가 입장시간이었다.

 

 

 

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른 길로 되어있어서

조금 힘에 부치면 왼쪽의 줄을 잡고 오르면 된다.

 

 

 

누에섬등대전망대의 입장료는 무료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 등대의 모습

 

 

 

전망대에서  보이는 제부도의 모습~

 

 

 

돌아나오는 길에 보니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듯 하다.

 

 

 

 

 

오빠~~ 이건 뭐야?

이 꼬맹이들은 수확이 좀 있는지 궁금하다.ㅎㅎ

 

 

 

서울로 돌아가다가 문득 떠오른 곳.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는 탱화가 있다는 용주사를 돌아보기로 한다.

 

 

 

 

 

 

 

용주사는 본래 신라 문성왕16년에 창건된 도량인데

잦은 병란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정조대왕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790년에 세웠으며

여타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없는 홍살문을 볼 수가 있는데

왕의 위패를 모셨기때문에 경건한 마음을 지니도록 하기 위해 홍살문을 세웠다고 한다.

 

 

 

 

 

대웅보전 낙성식 전날밤 정조대왕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어

절이름을 용주사라 하였고, 이 곳은 불심과 효심이 어우러진

정조대왕의 효심을 엿볼수 있는 뜻깊은 사찰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궁궐양식인 삼문(三門)이 있었는데

각각의 가둥에 용주사불로 시작되는 주련이 걸려있었다.

 

 

 

 

 

 

 

천보루와 5층석탑의 모습

천보루는 1790년 창건당시 지어진 건물이며

5층석탑안에는 부처님의 사리 2과가 봉안되어있다한다.

 

 

 

 

 

 

 

 

 

 

 

 

 

 

 

1790년 창건당시 지어진 대웅보전

내부에 봉안된 삼세여래후불탱화는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알려져있다고 한다.

사진촬영은 삼가란 글에 어쩔수 없이

직접 눈으로 보니 정말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국보 120호로 지정되어있는 고려초기의 범종.

하늘에서 내려오는 삼존불과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호성전에는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었다.

 

 

 

 

 

 

 

 

 

 

 

 

 

 

 

 

 

 

 

 

 

용주사를 보고 돌아나오는 길

정조대왕이 잠들어있는 조선왕릉 융,건릉을 찾아가다.

 

 

 

안내표지판을 읽고서는 웃어른의 묘를 먼저 찾아가봐야한다는 생각에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으로 방향을 잡았다.

 

 

 

 

 

융릉은 영조의 둘째아들이자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능이다.

영조는 28세의 나이에 죽은 세자를 슬퍼하며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정조가 즉위하자 존호를 장헌으로 올렸고 후 장조로 추존하였다.

 

 

 

1789년 양주 배봉산(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던

영우원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고쳐불렀으며

광무 3년 장종으로 추존,융릉으로 높였다.

 

영조나이 42세에 얻은 사도세자.

아들이 태어난 순간 왕위를 물려줄것을 결심한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난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하고 교육에 힘쓰라 신하들에게 부탁을 했다고 한다.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을 정도로 기대가 크고 귀히 여긴 아들이 사도세자였으나

정치의 소용돌이 속 과도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괴이한 행동을 한 세자는

영조의 미움으로 뒤주에 갖혀버려 끝내 목숨을 잃게 되었으니

자신의 아들을 처단해야하는 아버지의 비극또한 이 곳에 머물고 있었던건 아닐지..

 

 

 

융릉은 왕릉에서 보기 드문 원형연못인 곤신지가 있는데

용의 여의주를 상징하는 원형으로 아버지를 연모했던 정조의 마음이라 한다.

 

 

 

다시 건릉으로 향하는길.

융릉보다는 좀더 거리가 있어서인지

찾아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다.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인데

영조가 승하하자 왕위에 오른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며 선언 할정도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노력을 했으며,

또한 그의 왕비 효의왕후는 혜경궁 홍씨를 지성으로 모셔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한다.

 

 

  

 

 

건릉과 같이 능가까이에는 접근할 수가 없어서

멀리서나마 볼수밖에 없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왕조는 조상에 대한 존경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

조선왕릉 42기 능중 어느 하나 훼손된 것이 없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정조의 사도세자를 향한 그리움과 효심을 볼 수있었던

용주사와 융,건릉을 돌아보니 문득

부모님 살아생전 섬기기를 다하여라~~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그동안 뜸했던 안부전화도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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